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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 ‘탈스탈린화 정책’과 소련의 비상

기사승인 2017.12.15  13: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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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8) 소련의 비상(飛上)과 추락①

대조국전쟁의 승리는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소련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국토가 전쟁터로 변했던 소련의 인명 피해는 총 2700만 여명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약 867만 명에 이르는 붉은군대 장병들의 산화가 포함되었다. 물적 피해를 보면, 1710개의 도시 및 노동자 거주 지역과 7만 개 이상의 농촌 부락이 폐허가 되어 약 2500만 명에 이르는 주민이 주거공간을 잃었다. 3만2000개에 달하는 기업, 광산, 발전소 등이 파괴되고, 10만개 이상의 콜호즈, 솝호즈, 기계-트랙터관리창이 초토화되는 등 전체 국부의 약 30%가 상실되었다. 

1945년 농업 생산량은 전전(戰前) 기준 약 60% 정도까지, 특히 피점령 지역에서는 51% 수준까지 감소했으며, 경작지 면적은 약 70% 정도로 축소되었다. 인구를 보면, 1940년 소련 인구가 여성 약 1억 명, 남성 약 9230만 명을 합해 총 1억9260만 명이었는데, 1946년에는 여성 9620만 명, 남성 7440만 명을 합해 총 1억7060만 명이었다. 즉 전쟁을 거치면서 총 2200만 명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특히 농촌에 여초 현상이 심각했는데, 1940년에 1대1.1이었던 남녀 성비가 1946년에는 1대2.7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리는 소련과 스탈린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고양시켰다.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강국이 되었으며,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설교하는 “맑스-레닌-스탈린주의”에 열광한 사람은 후진 지역의 인민들뿐만이 아니었다. 서유럽의 노동자들도 소련의 군사적-정치적 성공과 선전에 고무되었으며, 이는 W. 처칠을 비롯한 구미 “제국주의자들”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국영통신사 ‘타스(Tass)’의 외경. 이 통신은 1904년 러시아 마지막 차르 시대에 세워졌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통신사(Telegraph Agency of the Soviet Union)’의 축약형인 Tass로 불렸다. [사진 뉴시스]

사회주의 대 ‘죽어가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결전

1946년 2월, 전쟁이 끝나고 실시된 소비에트 인민대의원 선거 유세에서 스탈린은 전전의 정책이 갖는 역사적 정당성을 역설하며, 앞으로도 똑같은 정책이 추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그 정책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라는 전략목표에 종속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중공업 위주의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대외정책적 목표는 자본주의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붉은군대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해방시킨 동유럽 지역이 전과 같은 “반(反)공산주의 방역선”이 아니라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지대(地帶)로 수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군사교리는 사회주의 대 “죽어가는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최후 결전의 불가피성을 선전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사회는 전투적 분위기로 충만해 있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그러한 분위기는, 스탈린이 보기에 “인민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데” 유익한 것이었다. 실제로 소비에트 사회는 전쟁 피해를 매우 빠르게 복구해갔다. 1947년 12월 소련은 전쟁에 참여했던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식량 등에 대한 배급제를 폐지했다. 과거와 같은 정책, 과거와 같은 인민들의 혁명적 열정을 통해 신속히 사회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졌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최종 심급으로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사회가 전쟁 전과 같은 이념적 단일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게 전열을 정비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6년 8월 “퇴폐적 모더니즘”을 선전한 М. 조셴코와 “부르주아 귀족주의 미학”에 젖은 А. 아흐마토바가 당 중앙위원회 서기 А. 즈다노프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작가동맹에서 퇴출되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대략 1948년부터 “부르주아 코스모폴리탄이즘”과의 투쟁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탄압 대상에 유대인이 많았기에 반(反)유대주의의 모습을 보였다. 이 캠페인의 계기는 구미의 유대인들과 연대하여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대처한다는 취지로 1942년 설립되어 활동을 이어간 〈유대인 반(反)파시스트위원회〉의 주요 인사들이 1944년 2월 크림반도에 유대인 자치공화국 수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낸 일이었다. 1948년 11월 위원회가 공식 해산되었지만 스탈린은 그들이 유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유대인 탄압은 1952년 봄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회원들이 반(反)혁명 및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연루자 13명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들 희생자 중에 의사가 1명 있었는데 이로부터 ‘의사사건’이 도출되었다. 1953년 1월 스탈린의 주치의 포함 9명의 “의사-독살자”가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이어 20여 명의 유명 의사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다. 이들은 당시 소련 의학계의 주요 인사들이었으며, 혐의는 시오니즘, 유대 민족주의, 미제국주의 첩자 등이었다. 이후 반(反)코스모폴리탄이즘 캠페인이 정점으로 치달았으나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또한 1949년에는 ‘레닌그라드 사건’이 적발되었다. 사건의 계기는 같은해 1월 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공화국 도매시장이 열린 데 있었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소련 정부의 승인 없이 행사를 조직한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등 3명을 직위에서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 사건은 레닌드라드 당 간부들의 체포로 확대되었다. 1950년 9월 ‘레닌그라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려 “핵심그룹” 6명이 반혁명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총살되었다. 이후 1952년 여름까지 사건이 계속 진행되었는데, 1949∼52년 동안 총 214명이 기소되어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 중 2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태의 주요 원인은 스탈린의 경계심에 있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핵심그룹”이 러시아공화국의 이익 옹호를 위해 러시아공산당의 창당을 논의했다는 정보에 극히 부정적으로 반응하였고, 러시아공화국의 작은 행사에서 비롯된 ‘레닌그라드 사건’은 러시아 민족주의의 발흥을 원천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기도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레닌도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었다. 

국제정치 영역에서도 스탈린은 자신의 전략목표를 실현함에 서방국가들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다. 1947년 6월 미국이 제안한 마셜플랜에의 참여를 거부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에게 소련과 함께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들과 더불어 같은해 9월 코민포름을 창설하면서 세계가 “제국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나라들은 “반(反)공산주의 방역선”에서 소련에 매우 우호적인 지대로 변모하였다. 1949년에 원자폭탄까지 확보한 그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양보하려들지 않았고, 소모적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때 1951년 여름 시작된 휴전 논의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약 2년을 끌었던 것은 “지금 종전은 적에게 유리할 뿐”이라며 “제국주의자들에게 결코 유익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스탈린의 독선 때문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V. 몰로토프의 회고에 의하면, 스탈린은 “제1차 대전은 한 나라를 제국주의의 노예상태에서 빼냈고, 제2차 대전은 사회주의 진영을 성립시켰으며, 제3차 대전은 제국주의를 완전히 끝장낼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만약 국제적 혼란이 당분간 야기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야말로 염두에 둔 것은 오직 전쟁인데, 나는 1960년에 전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다들 아시겠소?”

1) 소련의 비상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대다수 소련 인민들은 위대한 ‘인민의 영도자’를 잃었다는 슬픔과 상실감에 힘겨워 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개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L. 베리야, N. 흐루쇼프, G. 말렌코프 등 당의 최고위 간부들은 대개 10월혁명 이후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해방감이나 안도감과 함께 그들이 도모했던 개혁의 내용은 “소비에트 사회를 억압”하는 스탈린주의적 도그마를 합리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었다. 

중공업과 경공업의 균형 발전을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고, 그때까지 공민으로서의 권리가 적잖이 제한되었던 농민들의 생활과 권익을 개선하기 위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또한 문화예술 분야에 가해지던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느슨해졌으며, 노동교정수용소의 형사범들이 대규모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해빙”이라는 말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추세는 대외정치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목격되었다. 

특히 베리야는 1953년 5월 동베를린에서의 반소(反蘇) 시위를 계기로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스탈린에게 파문당한 유고슬라비아공산당과의 관계 개선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1953년 7월 한반도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5년 5월에는 소련의 양보에 따라 오스트리아 문제가 영세중립이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1956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흐루쇼프는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총괄보고를 통해 동맹국들에게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을 승인하는 동시에 평화공존론을 제기하면서 미국에 “평화스러운 공존”을 적극 요구함으로써 국제정세의 새 변화를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정치적 자신감은 그가 제20차 당 대회에서 인용한 세계 각국의 공업생산 변동 관련 수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 세계 각국 공업생산 변동 수치 (1929년 공업생산고=100%).

흐루쇼프의 탈(脫)스탈린화 정책 

흐루쇼프는 당 대회 폐막 직전에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이라는 제목의 비밀연설을 했으며, 그것으로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야기하며 탈(脫)스탈린화 정책을 예고하였다.

1956년 5월 경제 권력의 지방분권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내용은 중앙권력에 의한 산업별 관리를 지양하고, 중앙 경제 부처들을 축소, 폐지하고 각 지방에 인민경제회의를 설치하여 산업의 관리와 운용을 맡긴다는 것이었다.(이 조치는 1957년에 7%였던 국민소득 증가율이 1958년에 12.4%를 기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곧 전체적인 경제 조정에 많은 장애를 초래하였다.) 

1957년 2월에는 제2차 대전 때 독일군에의 부역에 대한 징벌로 스탈린이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체첸인 등 일부 민족에 복권 조치와 함께 본래 터전으로의 이주가 허용되었다.

이런 조치들에 당 간부들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7년 6월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는 흐루쇼프를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흐루쇼프는 당 중앙위원회에서의 재의를 요구하였고, 그리하여 소집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 간부들에겐 비밀연설로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를 지지했던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 시절에 누리는 지위와 권한 이상의 무한책임을 강요받았던 당 간부들은 자신들에게 드리워져 있던 ‘다모클레스의 칼’을 제거해준 흐루쇼프에게 안도감을 느꼈다. 1958년 12월 제정된 신 형법에는 “인민의 적”, “반혁명 책동” 같은 말이 삭제되었으며, 동시에 엄격한 법 적용이 강조되었다. 

소련의 비상(飛上)은 1957년 10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로도 확인되었다. 서방세계에 “스푸트닉 쇼크”를 안겨줬던 이 쾌거 이후, 1961년 4월에는 유리 가가린이 첫 유인 인공위성 〈보스톡-1호〉에 탑승해 지구를 선회하고 귀환함으로써 과학기술 강국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1959년 1월 개막된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는 스탈린 시대의 전략목표였던 ‘사회주의의 완전한, 최종적 승리’가 달성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개혁 결과를 결산하고는 1956년부터 시작된 5개년 계획을 대신하는 새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1959∼65년)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제 “소련이 공산주의의 건설에 착수하고 있다”고 선언하고는, 1인당 공업 및 농업생산에서 소련이 1970년경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이는 소련 인민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향유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1961년 10월에 열린 제22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로 등장한 소련이 ‘전(全) 인민의 국가’로 전환되었다고 선언하고서, ‘1980년까지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가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새 전략목표를 공시하였다. 계획의 무모함을 차치한다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후에 공산주의 건설이 다음 단계의 목표로서 설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는 국제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소련에서의 공산사회 건설 및 사회주의 세계체계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 평화공존을 “국제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특수한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제22차 당 대회는 흐루쇼프의 전략목표 수정에 따라 새로운 당 강령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새 당규를 채택하였다. 새 당규에는 모든 당직의 선거 원칙과 당직의 임기제한 원칙이 규정되었다. 예를 들면, 당 중앙위원은 임기 4년에 4회 연임, 민족공화국 및 각 주(州)의 당 서기는 임기 2년에 3회 연임만 허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당 간부들의 정치적 긴장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다.

또한 당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범죄들”이 다시금 요란하게 폭로되었으며, 붉은광장 한편의 영묘(靈廟)에 레닌 곁에 안치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신이 반출되어 크렘린 성벽 아래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러던 중에 농업에서 위기가 발생하였다. 농업 지도의 실패, 흐루쇼프가 추진했던 처녀지 개간사업의 파산 및 옥수수 재배 캠페인의 역효과, 가뭄 등으로 빚어진 흉작으로 식량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식품의 가격 인상과 임금 인하가 있었고, 이런 조치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1962년 6월 노보체르카스크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흐루쇼프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는데, 그로 인해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1963년에 소련 정부는 곡물 수입을 결정하였다.

1964년 10월 타스통신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노령 및 건강 악화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공직으로부터 사임하겠다는 흐루쇼프 동무의 요청”을 승인했다고 보도하였다. 그의 해임 원인은 1962년 10월에 있었던 이른바 쿠바위기가 아니었다. 중소 이념분쟁은 더 관계가 없었다. 전원회의에서 보고자로 나선 M. 수슬로프가 흐루쇼프에게 가한 비판의 요지는 협동성과 집단적 지도원칙의 훼손, 동료들의 의견 무시, 개인숭배 풍조의 부활, 그리고 경솔한 개혁과 빈번한 간부진의 교체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 조장 등이었다. 물론 마지막 비판이 흐루쇼프 실각의 가장 주요한 이유였다. 

흐루쇼프가 당내 “노멘클라투라”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새 헌법안을 논의하려 했던 1964년 11월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1962년 11월자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 즉 당 조직을 공업위원회와 농업위원회로 분할했던 조치에 대해 취소 결정이 내려졌으며, 당이 단일 조직으로 복원되었다. 흐루쇼프가 추진했던 다른 개혁 조치들도 계속 폐기되었으며, 1966년 봄 제23차 당 대회에서는 제22차 대회에서 채택된 당규가 정하고 있는 모든 당직의 선거 원칙과 임기 제한에 관한 규정이 폐지되었다. 또한 흐루쇼프가 버렸던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라는 명칭도 복원되었다. 

형식화된 맑스-레닌주의

스탈린을 비판하기 시작한 순간에 흐루쇼프는 이미 소련 인민들의 지지를 상실했다고 공언한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실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에 대한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개념의 선구자로서 흐루쇼프의 국내정치적 개혁은 소위 “자유화”라는 측면에서 소련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인민들은 흐루쇼프의 실각에 항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10월혁명 이후 계속된 사회주의 건설과 대조국전쟁, 그리고 “미국을 따라 잡고 추월하자!”는 캠페인 과정 속에서 자의였든 타의였든 일상화된 동원에 지치고 힘들었던 소련 인민들은 1980년까지 공산사회를 건설한다는 선전선동에 감격하기보다도 우선은 편안한 삶을 희구했다. 1962년경부터 드러난 흐루쇼프의 정책적 한계, 그리고 인민들에 대해 부단히 제기되는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동원령은 “피곤에 지친” 인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상실하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스탈린의 견해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맑시즘의 정치적 토대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계급적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非)계급적인 ‘전 인민의 국가’ 구성원이 된 소련 인민들에게는 이제 계급투쟁과 세계 혁명이 아니라, 차라리 소시민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스탈린주의, 나아가 맑스­레닌주의는 실제적인 사회경제적 토대를 상실하며 소련 사회에서 점차 형식화, 허구화되었다. 

‘설득과 강제’에 의거했던 스탈린의 지도방식과 달리 흐루쇼프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설득’에 토대를 두었다. 흐루쇼프는 인민들의 법적, 사회경제적 처우 개선이야말로 그들이 ‘사회주의적 창발성’을 발휘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라 믿었으며, 실제 그의 시대에는 인민들의 삶의 수준 향상을 위한 많은 정책이 추진되었다. 집단농장의 농민들에게도 연금혜택을 받도록 하였으며, 교육개혁을 통해 8년의 의무교육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확대하였다. 1950년경 약 125만 명이던 고등교육 대상자가 1964년경에는 약 360만 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주택 보급에도 노력하여 주택 총면적이 그의 치세에 거의 2배로 증가하는 등 흐루쇼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개념의 선구자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인민들은 생활안정과 더불어 흐루쇼프의 혁명적 슬로건과 수사에 적극 호응하지 않았다. 

공식 통계자료에 따르면,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기간 중 전체적으로 84%의 공업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농업은 목표치 70% 대신에 14%의 생산 증가가 있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953∼58년에 7.7%, 1959∼65년에 2.2%를 기록하였다. 

이완종 교수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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