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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위기의 교훈

기사승인 2017.12.15  16: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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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평론 겉과속 – 2017년 12월 17일

■ 들어가는 말

북에서 ICBM 화성-15호를 발사한 날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리차드 클라크 중장과 중국 중앙군사위 연합참모부 부참모장 사오위안밍 소장 등 미국과 중국의 고위장성들이 워싱턴에 모여 ‘쿠바 미사일 위기’를 연구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북미간의 대결이 극한점에 이르고 있고 전쟁위기가 눈앞의 현실로 닥쳐오자 ‘쿠바 미사일 위기’를 사례로 들며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막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며 미국의 상징조작이 성공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하던 사람들조차 미국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었으니, 미합중국대통령 존 F 케네디를 정의와 자유의 수호자, 세계평화를 지키는 지도자로 추앙하도록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밖을 나서면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이해와 케네디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뛰어난 협상술과 결단력으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뻔 한 위기를 막고, 소련의 흐루쇼프와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케네디의 무용담으로 되어있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바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1. 소련과 미국의 대결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14일 미국의 정찰기 U-2기가 쿠바 영공에 침투해서 찍어온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그 사진에는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소련의 중장거리미사일이 배치된 형상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1980년대말 유럽의 어느 위성이 찍었다는 북 영변의 핵시설 사진이 등장하면서 북핵문제가 시작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쿠바를 탈주한 사람들속에서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설치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돈지 오래되었지만, 케네디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선동적인 TV연설로 이 사실을 공개했다. 미국은 공포와 분노로 뒤섞여 들끓었다.

① 케네디의 협상술

당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제공한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이 터키에 중장거리미사일 주피터를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터키에 미사일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은 모스크바를 미사일 공격 사정권에 두게 되었다.

당시 미소 양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가지고 있었다. 거듭된 실패를 겪은 후 소련이 1957년 세계최초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 발사에 성공하였고, 미국도 1959년부터 ICBM 아틀라스Atlas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ICBM은 발사준비에 10시간에서 하루이상 걸리는 등 무기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뢰성과 효율성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미소양국은 1960년대 중반이후에 가서야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ICBM을 보유하게 된다. 아직은 중장거리미사일과 전략폭격기가 쓸만한 무기였던 시절이었다.

대결이 첨예해지던 그때 미소 양국은 상대를 선제공격 또는 보복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소련은 터키에 미국의 미사일기지가 만들어진 데 대해 큰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중장거리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만들어 전략적 열세를 만회해보려는 것이 소련의 주된 목적이었다.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고 하는 ‘쿠바 미사일 위기’는 10월27일 소련이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와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 동시 철수’를 제안하게 되자 해결되었다.

케네디는 공식적으로는 소련의 상호철수 제안을 거부하는 체 하였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소련의 제안을 덥석 물고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결말을 놓고 보면 골칫거리인 터키의 미국미사일을 철수시켰으니 소련으로서는 밑지는 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케네디의 ‘협상력“이 발휘될 틈은 없었다.

② 노회한 흐루쇼프

소련이나 미국은 터키와 쿠바에 미사일을 비밀리에 설치했지만 상대가 그것을 곧 알게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상대에게 위협을 주는게 목적이니 일부러라도 알려주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쿠바는 미국 해안에서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미국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곳에 중장거리미사일을 갖다놓는다는 것은 미사일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 하여도 상당히 공격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당시 소련 공산당 제1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다. 그 이유는 흐루쇼프의 성격만큼이나 다중적이다.

1960년 5월 미국의 정찰기 U-2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고 조종사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격화되던 미소대결에서 미국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1년 4월, 피그스만 Bay of Pigs 침공사건이 일어났다.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으로 탈주해온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잔당들을 훈련시켜 쿠바를 침공하여 카스트로 혁명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이었다. 대통령선거때 ‘쿠바의 공산화를 막지 못했다’고 전임 아이젠하워정부와 공화당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 계획의 실행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피그스만 침공은 이틀간에 걸친 미공군의 공습 지원을 받았음에도 침공군인 쿠바탈주자들과 CIA전투요원들이 쿠바정부군과 카스트로의 호소에 떨쳐나선 쿠바 국민들에 의해 모두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 침략사건이 알려지자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모진 비난을 받게되었다.

미합중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닉슨후보를 꺾고 당선된인기있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표차이는 겨우 15만표였다. 그리고 케네디는 미국 정치계의 오랜 유력가문인 케네디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부잣집 바람둥이 도련님으로 알려져 있는 등 군부강경파를 비롯한 미국의 주류집단의 입맛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사면초가에 몰려있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일을 벌었다. U-2기 격추사건과 피그스만침공 실패로 미국이 궁지에 몰려있을 때를 이용해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자기는 뒷감당도 안되는 쿠바 미사일 배치를 결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처지때문이었다.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자 격하운동을 돌발적으로 벌여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었던 말렌코프를 밀어내고 소련공산당의 지도권을 차지했지만 그의 당내 입지는 매우 취약했다. 제국주의자들에 대해 타협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내의 불만을 무마시킬 ‘건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흔히 신출내기 케네디가 노회한 흐루쇼프를 꺾은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케네디가 국제무대에 갓등장한 새내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지력이 약하고 충동적이라고 평가받던 흐루쇼프 또한 대단한 능력가는 아니었다.

더구나 흐루쇼프는 자기고백에서 밝혔듯이 2차대전때 나치독일의 침공에 대항한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와의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었다. 그가 사회주의의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식민지나라들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을 국가의 기본정책을 삼았던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흐루쇼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마자 갖가지 타협안을 케네디에게 제시하였으며, 미국이 해상봉쇄를 실행하자 곧바로 쿠바로 향하던 함선들을 회항시켰다.

케네디의 상대는 국제정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거물은 아니었다. 그저 스탈린의 심복에서 재빨리 변신하여 권좌를 차지한 약삭빠른 인물이었을 뿐이다.

③ 핵전쟁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가 사소한 충돌과 대결에 의해서도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깨우쳐주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역사에서 나름대로 기여한 바는 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때 미국과 소련이 ‘3차세계대전 직전까지 갔다’는 묘사는 과장된 것이다.

10월24일 미국은 전략공군사령부 소속 폭격기에 경계태세를 테프콘2(준전시상태에 해당)로 격상시켰다. 쿠바로 향하는 화물선을 보호하기 위해 쿠바 인근 해역으로 출동한 소련 잠수함은 미국의 폭뢰 공격을 받자 핵어뢰발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네디와 협의하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테프콘 격상조치는 전략공군사령부 소속 폭격기에 국한된 위협용이었다. 소련 잠수함 함장의 핵어뢰 발사 시도도 실제 권한을 가진 정치장교가 거부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폭뢰조차 잠수함에 해를 입힐 수 없는 연습용 폭뢰를 사용한 케네디의 소심한 협상용 행위였다. 흐루쇼프는 ‘미국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카스트로의 전보를 받고 ‘피델이 우리 목적을 전혀 이해하고 못하고 있다’며 투덜거렸다.

미소 양국은 사태를 3차세계전쟁, 핵전쟁으로 끌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우발적으로 그런 사태에 이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상대의 목적과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케네디나 흐루쇼프는 잘 알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수없이 열렸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에서는 소련과 전면전쟁, 핵전쟁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었고 주요 사안으로 다루지도 않았다.

‘3차세계대전 발발 위협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와의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케네디의 무용담은 지어낸 것이다.

④ 위기의 승자

‘쿠바 미사일 위기’의 승자가 누구인지 가르는 일은 간단치 않다. 미국은 터키의 미사일기지를 잃었으나 지중해에 폴라리스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배치하게 되어 손실을 상쇄할 수 있었다. 소련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해야 했지만 의외로 손쉽게 터키의 미국미사일 기지를 폐쇄시켰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소 양국은 장거리 전략폭격기를 실제 전력으로 중시하고 있었고, 또 실전사용 가능한 ICBM의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터키와 쿠바 미사일기지에 연연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언론플레이에서는 미국이 한수 위였다. 미국은 합의 사항중 자신들의 양보사항인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문서화하지 않았으며, 터키 미사일 기지를 폐쇄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이렇게 되니 사건은 핵전쟁위기에도 물러서지 않고 해상봉쇄를 고수한 케네디의 배짱이 소련 선박들을 돌려세우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킨 것으로 되었다. 케네디의 일방적 승리로 치장된 상징조작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2. 쿠바와 미국의 대결

조선조 임진년(1592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발발한 전쟁을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일본에는 '분로쿠·케이쵸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놈들이 일으킨 침략이란 뜻의 명칭을 쓰지만 일본과 중국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연호와 전쟁을 뜻하는 역을 붙여 만든 명칭을 사용한다. 이해관계와 입장에 따라 이름도 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소련을 비롯한 나라들에서는 ‘카리브해 위기’라 하였으며, 쿠바에서는 ‘10월 위기’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사건이 단지 미소간의, 흐루쇼프와 케네디간의 대결만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임진왜란’을 중국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일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결이라고 본다면 올바른 관점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쿠바가 있었다. 쿠바를 빼놓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① 위기의 원인

1959년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식민지배의 극악한 하수인이었던 바티스타독재정권을 몰아낸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극적인 드라마같은 혁명성공 일화들과 매력적인 젊은 이상주의자는 미국 사람들까지 매혹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미국의 식민지배를 청산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카스트로가 하버드 대학에 가서 초청 강연을 했을 때 온갖 찬사를 늘어놓던 당시 그 대학 문리부학장이었던 맥조지 번디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번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때 케네디의 특별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쿠바를 침공해서 카스트로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고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미국은 쿠바혁명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였다. 앞서 말한 ‘피그스만 침공’은 그 중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중의 하나일뿐이다. 케네디는 피그스만 침공을 승인한데 대해 겉으로는 사과했으나 그 작전이 실패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뿐만 아니라 케네디는 ‘피그스만 침공’이 실패하자 그해 1961년 11월에 ‘몽구스작전 Operation Mongoose’을 직접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비밀작전과 파괴공작으로 쿠바 정권과 경제를 와해시키려는 몽구스작전에 따라 미국은 쿠바에 공중폭격을 감행하여 항구와 석유저장시설을 파괴하고 쿠바의 주요 산업인 사탕수수밭을 불태웠다.

미국은 몽구스작전으로 1962년 8월 쿠바에 있는 호텔을 폭격하여 여러명을 숨지게 하였고 11월에는 쿠바 산업시설을 폭격하여 400여 명의 노동자를 사망하게 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쿠바 영토 이곳저곳과 화물선에 폭격을 퍼부었다. 쿠바의 대표적인 구리광산인 ‘마타암브레 구리 광산’은 아예 무장 병력을 보내 1961년 11월부터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는 날까지 세차례에 걸쳐 거듭 공격하였다.

몽구스작전의 주요내용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끝없이 이어졌다.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시도에는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CIA는 카스트로가 스킨스쿠버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독약을 주입한 스킨스쿠버 장비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선물로 보내는 작전까지 추진하였다. 물론 이 작전은 카스트로를 존경하는 외국의 어떤 기업가가 멀쩡한 스킨스쿠버장비를 선물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20만명의 정규군을 쿠바침공을 목적으로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반면 수만명에 불과한 쿠바혁명군은 초보적인 무기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코앞에서 혁명을 한다는 것이 고달프기 마련이지만 수시로 공습을 당하고, 전면 침공의 위험속에 살아야 하는 카스트로는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수단을 가져야 했다.

이것이 쿠바에 소련 미사일 기지가 들어서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다.

② 위기의 전개

미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카스트로의 희망은 깨어졌다. 1962년이 되자 쿠바는 미국의 쿠바 침공이 곧 감행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쿠바는 소련에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쿠바와 소련은 1962년 9월 ‘소련-쿠바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쿠바는 소련의 일류신 장거리 폭격기 등을 제공받고 SS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남미혁명의 진원지로 된 쿠바가 난공불락의 섬으로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미국은 이미 알고 있었던 쿠바의 소련 미사일 배치를 문제삼기로 작정하였다.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천인공노할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폭로 규탄한 케네디의 분노에 찬 10월22일의 TV연설은 이렇게 되어 실행되었다. 이것이 본격적인 ‘위기’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위기의 기간에 계속 열렸던 백악관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에서 다루어진 것은 ‘어떻게 하면 소련의 미사일을 철거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10여일이 넘는 동안 골몰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쿠바에 대한 침공, 전면공습을 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카스트로정권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을 동원하면 손쉬울 것 같았던 쿠바 침공이 막상 결행하려니 간단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쿠바 침공시 미군 전사자가 4500명 정도라고 예상했는데 다시 따져보니 2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케네디가 제 정신인가?’

‘위기’가 시작되고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려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쿠바에는 이미 핵무기를 장착한 미사일이 발사할 수 있는 상태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스트로는 미국이 침공하면 미국에 대해 핵공격을 하겠다고 공개 선포한 상태였다.

훗날 백악관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둘러댔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케네디는 쿠바가 핵공격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관련 정보들을 제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고 있었을 뿐이다.

③ 일단락된 ‘위기’

‘위기’가 발생하자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쿠바로 가고 있는 선박을 되돌리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 제안에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이 쿠바 침공에 있었고 이를 감행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위기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10월22일 쿠바소재 미군기지인 관타나모에서 미군가족 후송 작전을 펼쳤다. 쿠바 인근에 있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는 가상상륙훈련을 하였다. 이에 맞서 카스트로는 10월23일 쿠바군에 최고경계태세를 발동하고 국민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물론 미국은 ‘위기’의 전 기간동안 쿠바와의 직접 대화를 거부했으며 접촉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태는 미국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의 침공을 격퇴하겠다는 쿠바 국민들의 의지는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10만명이 안될거라고 계산했던 쿠바의 무장력은 27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전국민이 무장하여 침략자를 격퇴하자’는 카스트로의 호소에 쿠바 국민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카스트로의 인기는 매우 높았고, 쿠바 혁명은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거듭된 회의는 쿠바 침공에서 전면 폭격으로, 그리고 제한적 공습으로 점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10월27일 쿠바 영공에 침투하여 정탐활동을 하던 U-2기가 격추되고 미군조종사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때맞춰 흐루쇼프가 ‘쿠바 미사일과 터키 미사일 기지를 상호철거하자’, ‘쿠바에 제공한 일류신 장거리폭격기도 철수하겠다’, ‘쿠바에 대한 유엔 사찰도 수용한다’는 추가 양보안 등을 제시하였다. 미국은 이 제안을 덥석 물지 않을 수 없었다.

④ ‘위기’의 결말

‘미국은 쿠바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터키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며, 소련은 쿠바에 있는 미사일과 일류신 폭격기를 철수한다’는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합의가 이뤄짐으로서 ‘위기’는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이런 합의를 한 데 대해 쿠바는 분노하였다. 문서화되지도 않는 말뿐인 불침공 약속을 대가로 미사일을 철거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미 쿠바 소유로 되어있는 일류신 폭격기를 가져가겠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소 양국이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엔사찰을 합의한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듬해인 1963년 소련은 카스트로를 모스크바에 초청했다. 소련은 여려가지 경제원조를 내세우며 그를 무마하려고 했으나 카스트로는 소련에서 한 연설에서 흐루쇼프의 소련 공산당 지도부를 거침없이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어쨌든 미국이 추진하고 있던 쿠바 침공을 포기하고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함으로써 당면한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물론 미국은 불침공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후에도 폭격을 비롯하여 갖가지 도발과 적대행위를 계속 하였다.

4월 쿠바 어선 공격, 6월 포르투갈 주재 쿠바 대사관 폭파, 스페인 마드리드공항에 착륙한 쿠바 비행기폭파 미수, 중남미 바르바도스 쿠바 항공사무소 폭파, 멕시코 메리다 주재 쿠바 영사 납치 기도, 8월 아르헨티나 주재 쿠바 외교관 2명 납치, 바르바도스 상공을 비행중인 쿠바 비행기 폭파 73명 사망…. 이것은 1973년 한해동안 자행된 미국의 적대행위였다.

미국은 단지 ‘쿠바 침공’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지만….

④ ‘위기’의 장면

쿠바 위기는 흔히 소련의 선박이 미국 함정이 도열해있는 봉쇄선으로 점점 다가오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어떤 경우에는 미국의 함정들과 소련의 함정들이 일촉즉발의 대치상태에 있는 황당한 장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미국이 봉쇄를 실행하자 흐루쇼프가 쿠바로 가던 14척의 선박을 회항시켰기 때문이다. 화물선 부쿠레시티호 한척만 상징적으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당연히 부쿠레시티호에는 미사일 관련 부품이 실려있지 않았다. 적에게 나포될지도 모를 배에 특급군사비밀인 미사일 부품을 실어둘 리가 없었다.

그 시각 백악관에서는 봉쇄선에 배가 다가오면 정말 검색을 할 것인지, 검색을 한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한지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객선이라고 간주한 배는 검색을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무엇보다 쿠바로 가고 있었던 16척의 배는 사태의 핵심과도 거리가 멀었다. 쿠바에는 이미 미사일이 배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해상봉쇄는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주연과 조연을 맡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펼친 쇼에 지나지 않았다.

■ 맺는 말

‘쿠바 미사일 위기의 승자’ 케네디는 ‘위기’ 과정에서 능력이 다 드러나고 말았다. 당시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에 참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케네디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또한 케네디는 쿠바 전면침공을 열망하는 군부의 요구를 집행하지 못함으로써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가 케네디가 계속 대통령자리에 있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다.

‘개판이야 개판! 개자식아 똑바로 해! 라고 말해야 했는데’, ‘저 애숭이한테 이번에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자고.’

회의 중간에 케네디가 자리를 뜨면 그들은 이런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만은 이듬해 11월 댈러스의 암살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고 흐루쇼프가 승자의 길을 걸은 것도 아니다. 그는 애초 목적한 바와 달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충동적이고 나약한 자신의 정체만 드러내게 되었다. 반미자주노선을 추구하던 나라들의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된 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흠이 되었다.

이후에도 대내외 정책에서 실패를 거듭한 흐루쇼프는 결국 2년뒤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 코시긴 등에 의해 제1서기장직에서 해임되었고 가택연금된 상태에서 나머지 삶을 보내야 했다.

쿠바는 이후에도 미국의 파괴작전과 적대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을 굳건히 수호하였으며 2016년 쿠바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카스트로는 전국민무장이라는 군사방어노선을 찾아내고 시행하였다. 미국의 지배와 침략을 배격하고 소련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노선을 확립하였다. 제3세계 나라들이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깨달은 것도 핵전쟁발발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이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의 결단력과 협상술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케네디에겐 그런 것이 있지도 않았으며 설령 있었다해도 ‘위기’를 해결한 것으로 작용한 것도 아니다.

1962년 10월말과 11월초에 걸쳐 쿠바를 둘러싸고 벌어진 ‘위기’가 전면전쟁으로 번지지 않는 이유는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국민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안호국 시사평론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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