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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와 유럽의 자율운동(2)

기사승인 2018.06.18  10: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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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29)

앞의 글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유럽이 처한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유럽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 그리고 그 하부 체제인 유로 체제 아래 경쟁에서 탈락하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했어요. 독일, 프랑스는 이런 경쟁에서 승리해 제조업 국가로 자리를 잡았지만 금융자본의 투기로 부동산 및 자산 가격이 앙등하여 상대적 박탈감이 증가했지요.

이 시기(1980년→2010년) 유럽에서 자율운동이 등장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자율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은 없습니다. 다행히 국내에서 번역된 조지 키치아피카스의 책 <정치의 전복-1968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윤수종 역, E이후)이 약간의 도움을 줍니다. 아래에서 이 책을 참고하여 몇 가지 대표적인 운동만 소개하겠습니다.

위의 책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운동을 중점적으로 소개합니다. 저자는 두 나라의 운동을 노동운동, 여성운동, 반핵운동, 환경운동, 청년운동, 예술운동, 반파쇼운동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이탈리아 노동자의 자율운동과 독일의 반핵운동, 청년 점거운동만 소개하겠습니다. 아울러 영화 <노벰버>를 참고로 하여 유럽 예술운동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이탈리아의 자율적 노동운동

이탈리아는 전후 경제적 기적을 일으켰지요. 세계 7위의 산업국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산업 경쟁력은 취약해 60년대 말 불황이 다가오자 유럽 어느 나라보다 먼저 타격을 받았습니다. 70년대 들어 실업자가 증가하고, 인플레이션이 증가하면서 이탈리아 산업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조직 노조가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노동자들이 출현했습니다. 전쟁 중 동원된 여성 노동자와 전후 남부 농촌에서 북부 공업지대로 올라온 노동자이죠. 이들은 기존 조직 노동자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으니, 이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노동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 노조, 그리고 정당으로부터 자율적인(분리된) 운동, 즉 <Autonomia Operaia(자율운동)>을 전개했습니다.

70년대 초 기존 노조가 정부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때 <자율운동> 노동자들은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쪽으로 나갔습니다. 특히 73년 2월3일 노동자들은 투린에 있는 피아트 자동차 공장을 점거했어요. 이에 자극을 받아 2월9일 전국적으로 50만 노동자가 참가하는 파업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들은 주 40시간 노동제, 150시간 유급 휴가 획득을 요구했어요.

이들의 요구는 기존 노동조합의 요구인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과 달랐습니다. 오히려 임금보다는 노동을 줄이고 자아를 실현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어요. 이들은 자신의 운동을 ‘노동에 저항하는 분노’라 지칭했습니다. 그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적으로 관리하려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920년대 그람시 등을 통해 공장평의회 운동이 전개되었어요. 공장평의회는 경영자를 대신하여 노동자가 직접 공장을 관리하는 운동입니다. 러시아의 공장 소비에트 운동을 본받은 거죠. 이런 공장 점거운동이 70년대 자율운동 노동자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73년 전개된 자율주의 운동은 비록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만 그 이후 발전된 노동운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이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사진출처 : 구글 검색]

2) 이탈리아 77년

특히 197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자율주의자의 대대적인 투쟁이 발생했지요. 1976년 총선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이 승리했습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쿠데타를 우려했어요. 공산당은 선수를 쳐서 기독교 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 민주당이 주장했던 긴축정책(임금하락, 등록금 인상 등)을 받아들였죠.

그 때문에 노동자의 파업과 청년의 대학 점거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수도 로마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로마 시장(루치아노 라마)은 1977년 2월17일 노조를 동원해 대학에 진입했어요. 분노한 5만 여명의 청년, 노동자가 로마 거리로 나가 경찰에 대항했습니다.

로마에서 투쟁을 계기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투쟁이 폭발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볼로냐 대학에서의 투쟁이었어요. 경찰이 대학 점거에 동참한 노동자를 등 뒤에서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다음날인 1977년 3월12일 수천 명 청년, 노동자들이 볼로냐 거리를 점령했어요.

“경찰은 사라졌다. 피로, 분노, 기쁨, 굽실거리는 굴종의 수년 이후 반항의 냄새, 동지들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다... 쇼팽의 곡이 피아노로 연주되고 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말이다. 누군가 피아노를 술집에서 끄집어냈다. 바로 바리케이드 뒤에서... 오늘은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내일은? 내일이면 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올 것이다.”

자율주의 노동자와 청년은 패배했습니다만 그 투쟁은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서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3) 독일의 아우토노멘(autonomen)

독일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경제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덕분에 이탈리아에서처럼 강력한 노동운동이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빈집 점거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정부는 빈민촌을 재개발하여 중간계층을 위한 아파트를 건설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동산 투기를 낳았지요. 건설회사와 중산층, 시정부는 투기 소득을 얻었지만 이주민, 청년, 빈민은 도시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청년, 빈민, 이주민, 여성 등 자율주의자들이 개발을 위해 비워둔 빈집을 점거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어요. 점거운동은 80년대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베를린 마인쩌슈트라세 투쟁입니다.

1990년 통일 이후, 베를린 집값이 앙등하고, 상가 임대료가 증가했습니다. 동독에서는 공장이 폐업하고, 실업자가 양산되었지요. 이를 배경으로 1990년 4월30일 동베를린 지역인 마인쩌슈트라세 점거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1991년 11월12일 경찰이 해산 진입하자, 자율주의 청년들은 “우리의 집이 아니라 감옥을 없애라”, “국가가 정지하는 곳에 삶이 시작된다”면서 저항했으나 결국 오후 6시 경찰의 진입하여, 417명이 체포되고, 점거는 해체되었습니다.

이날 밤 1만5000명이 베를린을 통과 행진, 베를린 시청사를 점령했지요. 이들은 ‘투기꾼과 여피 돼지를 위한 죽음의 지대’를 설치하고, 고급 레스토랑, 값비싼 자동차, 장신구 상점을 습격했습니다.

4) 벤트란트 자유공화국

독일은 미군이 주둔하면서 동서냉전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미국은 독일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죠. 더구나 독일은 대규모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심각하게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산업을 위해 값싼 전기를 만들기 위해 핵발전소를 건설하려 하자, 이는 독일인의 감수성을 폭발하였습니다.

1977년부터 사회민주당 정부는 동독 쪽으로 돌출한 지역인 고어레벤이라는 곳에 핵폐기물 처리 시설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지역 농부들이 주도하여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1979년부터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자 1980년 5월3일부터 6월6일까지 한 달 정도 전국의 자율주의 활동가들이 고어레벤에 모여 점거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활동가들은 고어레벤에 독립공화국을 선포하고 <벤트란트 자유공화국>을 수립했어요. 판자를 모아 집을 지었고, 태양열을 이용해 전기를 공급했어요. 이들은 여권을 발급했고, 지하 라디오방송을 시작하고 신문을 인쇄하면서 핵재처리 시설 반대여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벤트란트 자유공화국은 가부장적 가족, 소도시의 획일적 삶, 국가의 관료주의, 회사의 소외된 문화를 거부하는 새로운 자유 공화국이었습니다. 1980년 6월3일 8만여 명의 경찰이 벤트란트 자유공화국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자유공화국은 무너졌지만, 이 때문에 전국에 25개 도시 이상에서 자율주의자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반핵운동은 독일정부가 핵발전소를 지으려 할 때마다 발생했습니다.

5) 자율주의 예술운동

자율주의 운동에 예술가들이 어떻게 참여했는가는 영화 <노벰버>가 잘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스페인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연기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상업적인 연극, 무대에 고립된 연극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는 마침 함께 연기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을 모아 길거리 극단을 창립하죠.

이 극단은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상업적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길거리에서 시민들 속에서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리에서 시민들의 현실에 안주하면서 소비적인 쾌락을 즐기는 이른바 여피 문화를 공격합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조롱과 풍자였지요.

그들 가운데 한 단원은 댄서로 일하면서 그렇게 번 돈으로 연극을 공연합니다. 현실은 그렇게 쉽지는 않지요. 연극은 걸핏하면 경찰에 의해 차단되고 소품은 몰수되고 그들 자신은 구치소에 갇힙니다. 더구나 다른 단원의 연극을 위해 나체 댄서로 돈을 버는 단원은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죠.

결국 그들은 상업적인 연극에 고용되고, 무대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이 무대 공연을 통해 오히려 실제 사건을 일으키려 합니다. 주인공은 이 연극에서 스스로 총에 맞아 죽는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 죽어갑니다.

이 영화는 스페인에 있었던 자율주의 예술가의 운동을 보여주지만 이런 운동은 스페인 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확산되었습니다.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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