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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세계관(3)- 종교적 믿음

기사승인 2018.09.18  13: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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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백문백답(41)

1) 나를 보내지 마

컴퓨터와 사랑하는 세계가 이루어질 것인가? 유물론자라면 “언젠가는!” 하고 미소(??)를 지을 것이다. 반면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내 손에 장을 지져라”하고 벌컥 화를 낼 것이다.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는 자주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를 소재로 삼는다. 아마 그 효시가 된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도 이런 영화가 죽 이어졌다.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영국계 일본인인 가즈오 이시구로(2017년 노벨상)의 소설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이다. 이 작품도 영화화되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장기이식을 위해 태어난 복제 클론의 비애를 그린 작품이다.

가즈오의 소설은 복제 클론을 주제로 잡고 있으니, 물질로부터 나온 안드로이드와는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복제 클론의 인간으로서 자격을 문제 삼을 수 없지만, 사람들은 대개 안드로이드의 한 유형으로 격하한다.

복제 클론이든 안드로이드든 문제는 같다. 이런 존재들도 인간으로서 자격과 권리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을 위해(예를 들어 장기이식이나 물질적 생산을 위해) 그런 복제 클론, 안드로이드를 노예화하고 살해할 권리가 있는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관념을 가진 존재,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는 존재는 그게 복제 클론이든 안드로이드는 이미 인간이다.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간이고 어떻게 보면 인간도 복제 클론이나 안드로이드의 일종이다. 그러니 복제 클론과 안드로이드를 살해하거나 노예화한다는 것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정할 수 없다.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복제 클론이나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만든 물질에 불과하고, 아무리 관념을 가지고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신이 부여한 영혼과는 수준이나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니 인간과 자격이나 권리에서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안드로이드는 노예로 삼아도 무방하며, 필요하다면 인간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될 것이다. 기껏 대우해도 애완용 동물 수준일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이제 어느 편을 들겠는가?

2) 과학도 믿음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과학은 환원주의 전략으로 많은 것을 물질로 환원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알파고가 나오는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물질로부터 의식적 존재, 즉 관념을 생산하는 존재에 이르지는 못했다. 어쩌면 물질과 관념 사이에는 전 우주보다 더 큰 심연이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종교와 과학의 처지는 어정쩡하게 되었다. 과학이 야금야금 쳐들어오면서 신이 존재한다는 종교의 확신은 점차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고 과학이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는 어떤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질과 관념 사이에 심연이 조금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심연은 무한하니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속으로 거의 8부 능선에 올랐다고 하나 정상은 아득하니, 오히려 낙담하고 지금까지 땀을 흘린 의미가 무언가 불안한 지경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종교를 믿게 되는 것을 체험에 의존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대부분의 신자는 신을 체험한 적은 없다. 여기서 결단이란, 어떤 증거는 없지만 있을 거라는 믿음에 기초한 선택을 의미한다. 이런 결단은 그 자신의 삶의 결단이며 그런 결단으로부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데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관념 사이에 심연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한, 과학의 환원전략을 믿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도 종교적 결단만큼이나 엄청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이 종교적 믿음과 같은 믿음 위에 시작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똑 같은 결단이라는 사실은 약간 역설적이다.

3) 종교적 삶의 결단 

종교든 과학이든,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하나의 결단에 따른 선택이라면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선택하면 된다는 말인가? 삶의 결단이니 물론 그렇다. 자기의 선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 선택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니 고독한 실존의 결단이다. 우리는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계관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따져볼 수는 있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 관념론을 결단하는 사람과 과학, 유물론을 결단하는 사람의 각기 논변을 들어보자. 물론 이런 논변은 결정적 근거가 되지는 못하며 다만 최종 선택을 도와주는 정도일 뿐이다.

종교적 세계관,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1) 철학적 논변이 있다. 중세 이래 스콜라철학자들이 개발해 왔다. 신은 세계의 시초이며 전체이니 또는 자연 조화의 배후이니 하는 논변이다. 그런 논변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런 논변들이 이율배반에 빠진다는 것을 논증한 이래 그런 논증은 별로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만 말해 두자.

반면 이런 철학적 논변과 달리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논변도 있다. 그것은 역시 2) 기적과 신비, 은총의 논증일 것이다. 기적, 신비라는 말은 잘 이해할 것이다. 은총이라는 말의 뜻은 이렇다.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결코 합리적 이유에서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은총이며, 난 그 앞에 엎드려 감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 신비, 은총이라는 것은 과연 있는가? 철학자들은 기적이나 신비, 그리고 은총이 정말 기적이고 신비이고 은총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논증해 왔다. 우리 어머닌 작은 신흥종교를 믿었다. 항상 내가 무엇이 되든 그것은 자신의 기도 덕분이라 한다. 슬프게도 나의 노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늘 어머니의 기도가 효력이 있는지 의심해 왔다.

4) 직접 체험 

종교적 세계관은 이 정도의 반박으로 낙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종교를 옹호하는 두 가지 강력한 논변이 있다. 그것은 ‘직접 체험’과 ‘도덕적 논변’이다.

신을 직접 만났다는 주장이 있다. 성경에 바울이 신을 만나는 체험이 기술되어 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도 신의 체험을 서술한다. 나는 흥미롭게도 두 분의 체험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분은 그때 다 몸이 떨리는 체험을 했고 신의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은 도덕적 행동의 지침이 되는 말씀이다. 두 분 다 신의 모습을 형상으로 그려내지는 않았다. 그 신의 형상이라면 불꽃과 같은 무형상의 형상이다.

신을 만난 체험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신의 체험에 어떤 객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신의 체험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체험일지도 모른다. 이런 체험을 헤겔은 “인간 정신의 자기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또는 “절대정신의 표상”이라고 했다(이 개념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은 유물론자이지만 단 한 번 신이 존재한다는 어떤 예감을 느낀 적이 있다. 군대에서 고생할 때다. 정확히 언젠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갑자기 무언가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누구한테 대한 것이 아니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몸이 떨리거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니다. 마치 입안에 흐르는 싸한 향기처럼 그런 두려운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저 두렵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이런 느낌이 발전하면 신에 대한 체험일까?’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그 뒤 다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군대에서 사병으로서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운동장에서, 내무반에서 차이고 밟히고 이리저리 뒹굴 때였다. 그때 심정이 환상적으로 그런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대개 절망이 극도에 도달한 사회에서 메시아적인 기대감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종교가 창시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5) 확율 논변 

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파스칼의 확률론이다.

파스칼의 주장을 들어보자. 만일 신이 없다면 신을 믿어 두어도 별 손해나는 것은 없다.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유황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어마어마한 손해가 된다. 이렇게 이익을 계산해 보면 신을 믿는 것이 행복의 확률상 유리하다는 것이다.

파스칼의 논증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런 파스칼의 논증에 따라 신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사후에 하나님 앞에 가서 ‘내 돈 내놓으시오’ 하면서 청구서를 내미는 이기적 신자를 하나님인들 좋아하겠는가? 하나님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신을 믿겠다는 파스칼은 분명 지옥으로 떨어뜨렸을 것이다.

아직 가장 강력한 논변이 남았다. 그것은 도덕적 논변이다. 종교는 신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새로운 세상을 열어놓는다. 그 세상은 새로운 말씀(곧 도덕, 율법)에 기초한다. 기독교와 동학이 어떻게 출현했는가 생각해 보면 이해될 것이다. 종교가 인류 역사에 가장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이다. 이미 길어졌으니, 이 부분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자.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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