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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관리대책의 시작과 붕어빵 노점상 이근재 열사

기사승인 2019.08.13  20: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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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기 빈민스토리(14)

1. 2007년 노무현 정부와 고양시 노점단속

2007년은 전국적으로 '노점관리대책'이 모색되던 때다. 이 시기 노무현 정부는 오랜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에 맞섰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권단체 연석회의'에서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10월 초까지 생존권 투쟁을 벌이다 구속된 노동자의 수가 1천 명을 넘어섰던 것으로 보고한다. 그중 70%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한 해 평균 구속 노동자의 수는 235명으로 김영삼 정권 때 126명, 김대중 정권 때 178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가 이 시기 구속되었던 것으로 조사된다.
시 빈민과 농민에 대한 탄압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대해서 집시법, 업무방해, 공무방해, 특수공무 방해, 폭력 등의 죄목을 붙여 구속하거나 과도한 벌금을 부과하였다. 차별 철폐를 외치며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와 단체교섭의 권리마저 외면했다.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기치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도 기본적인 생존의 권리마저 부정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있었다. 이렇게 노무현 정부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개개인의 삶이 사회적 과정이나 구조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노점상 이근재 씨가 목을 매달고 자살을 선택하였으며, 건설 노동자들의 지옥 같은 현실을 고발한 정해진 씨 역시 죽음의 길을 택했고, 안산의 서울우유 화물노동자들은 분신을 결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무현 정부 아래 저항하는 극단적인 방식의 하나인 죽음들이 계속 이어졌고, 현실은 녹록지 않았으며, 생존권은 억압당했다.

2007년 서울시 발표를 시작으로 노점관리대책이 전개되고 다른 지자체가 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고양시는 독자적으로 노점관리대책을 진행한다. 먼저 고양시는 2007년 2월 21일 ‘질서있는 품격도시만들기 추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소위 ‘4대 기초질서’ 분야인 불법 노점상 및 불법 노상적치물, 불법 주정차 및 불법 광고물을 정비함으로써 법과 질서가 잡히고 깨끗한 도시환경 정비 및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4월부터 야간에 특별단속을 하여 23개의 노점을 적발하고, 천막과 발전기 등 노점 물품 78점을 수거했으며, 노점 차량을 고발조치 하는 등 강력한 단속을 전개한다. 노점상이 반발하기 시작하자 한쪽으로는 2007년 5월경 '생계형 노점상은 장사를 보장해 주겠다.'라는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노점 정비기금을 10억에서 21억을 또 증액해 버렸다.
리고 5월 26일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2동장과 동사무소 8개 직능단체회원 및 주민 100여 명을 모아 놓고 ‘4대 질서 지키기 실천 결의대회 및 노점상 이용 안하기 홍보 캠페인’을 마두2동 전역에서 실시한다. 이 자리에서 “노점상은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는 고양시의 위상에 걸맞은 질서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명품도시 만들기에 있어 ‘장애’이며 기온이 급상승하고 습도가 높은 장마철이 다가오는 계절에 비위생적인 방법으로 음식물을 조리하여 판매하는 것은 ‘불결’ 하다”는 식의 교육을 한다. 그리고 노점상의 주장은 생계가 어려워 거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기업형 노점상의 이권을 위한 ‘폭력집단의 횡포다"고 캠페인을 전개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시민들에게 노점상 이용 안하기를 강조하며 ‘가족의 건강을 해치고 나아가 불법적이며 비위생적인 노점상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노점상과의 면담을 통해 "생계형은 장사를 보장해 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였다.

2. “여보 미안해” 붕어빵 노점상 고 이근재 열사

▲ 노점상 이근재 열사 집회장면

고양시 노점상 고 이근재 열사의 죽음을 전달받은 것은 10월 13일이다. 이날은 전국의 노점상대표가 모여 회의를 개최되던 날이었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노점상 단체가 조직되어 있어 현장으로 달려간 단체 중앙활동가와 각 지역 대표들은 사인을 확인하고 즉각 대응하기에 이른다. 고 이근재 열사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고양지역의 토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목수일을 하던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3살 무렵 고양시 덕양구 능곡으로 이사와 살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은 이근재 열사는 1981년 부인 이상미 씨와 결혼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며 책상․걸상 등을 만드는 목수 일로 근근이 살아왔다. 그리고 IMF 직전 공장이 부도나자 실직 후 곤란해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고양시 서구에 위치한 문화초등학교 앞에서 붕어빵 노점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들어 고양시 전 지역에 노점상 단속이 실시됐다. 이근재 열사 부인 이상미 씨는 다음과 같이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저는 장사를 준비했고 다른 노점상은 야채와 떡볶이 과일을 폈는데, 깡패들이 몰려들어 몸싸움이 벌어졌어요. 손수레가 다 엎어지고, 아주머니들이 밑에 깔렸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 때려 부수더라고요. 거기다 마차를 안 뺏기려고 온 힘을 다 쓰고 있는데, 그냥 젊은 애들이 팔꿈치로 밀고 난리가 났었어요. 저희 아이 아빠는 밖에서 못 들어오게 막자 단속받는 걸 다 지켜보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나 봐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제가 누워 끙끙 앓는 소리를 하니까 미안하다고 맨 날 고생만 시키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

이근재 열사는 아내가 용역 깡패에 둘러싸여 붕어빵 마차가 엎어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침통해 했다고 한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써 그는 부인에게 “여보 미안해, 당신 고생 시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새벽 운동복 두벌만을 싸 들고 공사장으로 일하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철로 변에서 목을 매단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그를 아는 지인들에 따르면 이근재 열사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가난한 삶이었지만 검소하고, 평범한 서민이었다고 전한다. 항상 소탈한 웃음으로 다가왔던 이웃집 아저씨이자 동료 노점상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장사해오며 두 자녀를 키웠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아파트를 장만했지만, 대출금을 갚느라 빠듯한 살림을 이어오던 터였다. 이근재 열사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자살이지만 성실하게 노점을 하며 삶을 살아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용역 깡패를 동원한 폭력적인 단속이었다. 고양시에는 실태조사를 하고 거부하는 노점상 단속에 무려 31억 원의 시 예산을 쏟아부었다. 무자격 용역업체를 선정하고, 불법적인 계약을 통해 행정대집행에 진행했다. 이근재 열사의 죽음은 고양시의 폭력적인 단속과 노점관리대책이 그 배경이었던 것이다.

3. 경기도 고양시에서 전개된 노점상 대투쟁

▲ 이근재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는 노점상

10월 16일 덕양구 화정역과 고양시청 앞에서 죽음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노점상 회원 약 3천5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한 이 날, 시청 앞 오거리 일대의 교통이 한때 마비되고 일부 부상자가 발생했다.

“만일 고인이 노점단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살을 하려고 했다면 집회장소를 택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 했을 것입니다. 사람도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자살을 했다는 사실은 단속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고양시청은 이근재 열사의 죽음이 무관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개인 탓으로 돌려 대화를 계속 거부하였다. 저녁 무렵 해가 어두워지자 경찰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은 참여자를 향해 물대포를 뿌렸다. 겨울로 접어드는 늦은 밤 집회참여자 추위를 막고자 불을 피우고 일부는 보도블록을 깨 돌멩이로 맞섰다. 고양시청 측은 시위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컨테이너 4개를 시청 정문에 설치하였다. 분노한 시위대는 컨테이너끼리 연결해 놓은 쇠줄을 절단기로 끊고 컨테이너 1개를 밧줄로 묶어 정문에서 떼어낸 후 시청 앞 오거리까지 끌고 내려가 폐타이어를 던져놓고 불을 질렀다. 노점상의 분노와 함께 검은 연기가 시청앞 오거리에 치솟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자 늘어난 전투경찰들은 공격대형으로 자세를 바꿔 물대포를 다시 쏟아붓기 시작했다. 노점상들은 준비해온 횃불 약 30여 개에 불을 붙이고, 시장의 직접적인 사과와 단속중단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시청 정문 조경수가 불에 타고 철제 정문이 파손됐으며, 집회참여자와 경찰 다수가 다쳤다. 결사항쟁으로 싸울 각오를 한 노점상 단체의 회원 약 50여 명의 손에는 각목과 쇠파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방송을 듣고 달려온 시민사회단체 회원들로 시위대오는 계속 늘어나자 긴장한 경찰은 물대포를 맞아 추위에 떨고 있는 노점상에게 사과탄과 최루액을 뿌려댔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물러서지 않고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 경찰 측과 노점상대표단의 대화를 통해 다음날 고양시와 협상을 하는 조건으로 횃불시위는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방송에서는 경찰 15명과 시위대 50여 명 등 모두 65명이 다쳤으며 13명이 폭력시위로 경찰에 검거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음날에도 노점상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고 이근재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고양시 노점탄압 책임자 처벌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비상대책위(비대위)'에 약 70여 개에 달하는 사회단체들이 동참했다. 고양시청 앞에서 노점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집회를 개최하고 곳곳에서 규탄 선전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8일 고양시청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요구사항을 수용키로 한다. 고양시는 ‘노점단속 중단 요구에 대해 시·노점상·시민단체로 협의회를 구성해 고양시가 이미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는 생계형 노점상 보호를 포함해 노점상 문제를 협의하기로 한다. 또 용역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책임자 처벌문제에 대해서는 고양시청 대표가 유가족을 찾아가 애도를 표하고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유가족 보상문제도 원만한 타결을 위해 고양시가 지속해서 노력한다는 방침이었다. 열사의 미망인은 그동안 노점을 해 온 자리에서 계속 장사를 하게 되었다. 장례가 치러지기 전까지 총 8차에 걸쳐 대규모 집회가 진행되었고, 숨을 거둔지 꼭 27일 만에 장례가 치러졌다.

11월 9일 약 2천여 명의 노점상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일산복음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주엽역 태영플라자부터 고인이 생전 노점을 운영했던 문화초등학교 앞까지 추모 행진을 벌였다. 당시 김흥현 전국빈민연합 의장은 추모사에서 "죽을 이유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정한 짓 단 한 차례 저지른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천대받는 거리의 노점상이었지만 대학 간 딸, 군대 간 아들 생각하면 죽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짓밟히고 31억으로 동원된 용역들의 폭력에 노점상들이 휘둘리는 꼴을 볼 수 없어서 저세상으로 간 사람입니다." 라고 외쳤다. 오후 12시 이근재 열사가 장사하던 문화초등학교 앞에서 노제가 개최되었다. 하굣길에 나선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신기한 모습으로 장례행렬을 지켜봤다. 주변 은행나무 가로수는 붕어빵처럼 노란 나뭇잎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리고 가끔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장례식이 끝 난후 고양시에서는 ‘노점상 관리대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2008년 3월 28일 고양시 도로점용 허가 및 점용료 등 징수조례 개정이 확정된다. 기본적인 조례 몇 가지를 손질하고 ‘노점관리대책’은 곧 시행에 들어간다. 일부 노점상들은 ‘길벗 상인회’라는 이름의 별도 노점상 단체를 조직하여 실태조사를 받아들이고 노점상 단체를 탈퇴해 고양시 '노점관리대책'에 편승한다. 한편 당시 노점상 단체 중앙간부들은 구속과 수배상태에 놓이게 되자 고양시는 공백을 틈타 노점관리대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이제 노점관리대책은 경기도 광명시 등 경기도를 넘어 전국적으로 모색되어진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도 배후에 누가 결정하고 누구의 지시였는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당시 활동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때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게 한 게 누구였더라? 분명한 것은 당시 노점상 단체의 중앙에서 조직적으로 결정한 사항은 아녔다. 그날의 현장은 다중의 분노와 동일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적인 저항이었고, 또 누군가가 선도적으로 투쟁을 조직하였다. 이날의 싸움에 대해 노점상 단체의 패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근재 열사 투쟁은 노점상 정책의 기만적인 내용을 알려낸 투쟁이었다. 처음부터 노점관리대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자세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점상이 소리소문없이 삶에 현장에서 먼지처럼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노점상의 암울했던 생애는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면서 세대를 초월하여 또 다른 노점상의 삶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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